장춘식 목사의 선교 이야기 - page 15

교수임용 제의를 받기도 했으며 1906년에는
일리노이 웨슬리 대학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러나 그는 1907년 다시 내한해서
1909년 6월 귀국하기 전까지 미감리교회
서울지방 감리사 겸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
대한성서공회 회장 그리고 특별히
미남북감리교회가
협력해서
설립한
협성성경학원(현 감리교신학대학교) 초대 원장을
역임했다.
존스는 한국을 세계에 알리고 또한 우리나라
초창기 신학교육의 내실을 위해 누구보다 문서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선교사요 학자였다. 존스는
1892년 로드와일러와 공동으로 <찬미가>를
편찬했고, 같은 해 올리거가 창간한 <The
Korean Repository>의 공동 편집인, 1900년
<신학월보> 발행인, 1901년 헐버트가 창간한 <The Korea Review> 주필, 그리고
1900-1909년 왕립 아시아학회(Royal Asiatic Society) 한국지부 부회장 등으로 한국
역사 정치 문화 종교 한글 분야 등 다방면에 걸쳐서 여러 곳에 많은 글들을 발표했으며,
한글로는 <구약공부> (1891), <성서총론>(1901), <영한사전>(1904) 등, 그리고 영어로
<Korea, the Land, People and Customs>(1907), <The Kore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1910) 등 여러 개인 저작들을 출판했다.
존스는 한국 감리교회 엡윗 청년회와 YMCA 창립 그리고 성서번역 사업에 관여하고
지원했으며 1903년에는 알렌의 부탁을 받고 선교지역 교회 교인들을 독려해서 하와이
이민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1907년에는 배재동문 노병선과 협조해서
미감리교회와 장로교회의 통합교육정책 때문에 폐교될 위기에 있었던 배재학당을
복교시키는 일에도 공헌했다.
1909년 6월에 귀국한 존스는 뉴욕 미선교본부에서 편집 및 협동총무로 활동하며
1910년 미감리교회의 한국선교 25주년을 맞이해서 기념사업을 총괄했고 벵겔은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한편 미여선교회의 한국선교를 정리하는 입장에서 <The Lure of
Korea>를 저술했다. 두 부부는 또한 전국적으로 선교후원금을 모금해서 한국선교를
지원했다. 존스는 동시에 1911년 디포우 대학(De Pauw University)과 1915-1918년
보스턴 신학대학에서 선교학을 강의하며 1917년에 <The Rise of the Church in
Korea>와 1918년에 <Christianity and World Democracy>를 집필했으며, 그 다음 해
5월 11일 오랜 투병 끝에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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