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춘식 목사의 선교 이야기 - page 10

스크랜톤 모자
올해로
한국
기독교
선교
130주년을
맞이한
한국교회의
부흥과 발전은 세계 선교 역사에
있어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한국 감리교회의 경우만 보더라도
감리교계통 중고대학교가 모두 60여
곳에 이르고 선교를 받던 교회에서
선교하는 교회로 성장해서 이제는
세계 75 나라에 1 천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가 되었다.
국가 경제 규모도 비약적으로
발전해서 세계 10위권 이내에
진입했다. 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첫 번째로 그것은 서구식 근대화
교육에 대한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결단이
아니었겠는가?
고종과
명성황후가 개혁과 근대화의 원동력으로 교육과 의료선교를 허락하지
않았더라면 현재와 같은 한국 근대화와 교회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선교적인 측면에서 조선선교의 개방을
가능하게 했던 가우처 박사의 역사인식과 수고를 들 수 있다. 가우처가
없었더라면 조선선교는 알맞은 때에 맞추어 문을 열지 못했을 것이다.
미감리교회 한국선교의 경우에 있어서 교육과 의료 선교분야에서
인수받은 목사와 젊고 유능한 의사 그리고 그들을 포함한 선교사
가족으로 팀을 이루겠다는 것은 원래 가우처 박사의 구상이었고 그렇게
해서 아펜젤러 목사 부부, 윌리엄 스크랜튼 의사 부부, 그리고
미여선교회에서 파송한 스크랜톤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톤 여사가
미감리교회 한국선교의 첫 선교 팀으로 우리나라 땅을 밟게 되었던
것이다. 가우처는 또한 이들이 정동일대에 구입한 선교베이스의 재정적
후원자이기도 했다.
윌리엄 벤톤 스크랜톤(William Benton Scranton, 1856-1922)은
1878년 예일대학과 1882년 콜롬비아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룰리
암스(Loulie Wyeth Arms)와 결혼하고 어머니와 함께 식구 모두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로 이주해서 개업의로 활동하다 1885년 5월
3일 한국선교사로 파송 받고 그 해 9월 10일 정동 감리교
선교부지에서 의료선교 (시병원)를 시작하는 한편 1890년에는 다시
상동병원을 설립해서 환자들을 돌보았고, 1892년에는 상동교회를
설립해서 목회하기도 했다. 그는 성서번역사업에도 위원으로
관여했으며 1907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독자적으로 의료봉사를 하다
일본으로 귀국해서 1922년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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