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 헐버트
우리말로
흘법
(
訖法
)
또는
할보
(
轄甫
)
라고
불렸던
헐버트
(Homer B. Hulbert,
1863-1949)
는
1886
년
7
월에
우리나라로
파견된
최초의
미국인
교사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
당대의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서구식
근대교육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된
고종은
육영공원
(Royal English School)
설립을
계획하고
미
국무성에
원어민
교사를
보내주도록
청원했던
것이다
.
헐버트의
부친은 회중교회
목사로
미들베리
대학
학장
(1875-1880)
을
역임했고
모친은
다트머스
대학
(Dartmouth College)
창립자의
증손녀였다
.
헐버트는
1884
년에
다트머스
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기
위해
뉴욕
유니온
신학교
2
학년에
재직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
국무성
국장이었던
이튼을
통해
그의
부친으로부터
한국에서
교사를
모집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했던
것이다
.
헐버트는
교육자로서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대부요
선각자였다
.
그는
1898
년에
고종으로부터
우리나라
교육의
총책임자로
임명받기도
했다
.
헐버트는
1886
년
9
월에
창립한
육영공원의
운영을
위해
교과과정과
교육방법
등
제반
사항에
대한
규정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1890
년에는
학생들을
위해
순
한글로
사회지리총서인
사민필지
(
士民必知
)
를
발간했으며
,
1891
년에는
육영공원
교사직을
사임하고
일시
귀국했으나
2
년
후
목사안수를
받고
아펜젤러의
권면에
따라서
감리교
선교사로
재입국해서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 1897
년에는
다시
고종의
요청을
받아들여
서구식
교사
양성을
위해
설립된
한성사범학교
교장으로
부임해서
교과과정과
교과서들을
마련했고
, 1903
년부터
1905
년
까지는
관립중학교
(
현
경기고등학교
)
교사로
봉사하며
우리나라
근대
교육
제도와
운영의
기초를
닦았던
것이다
.
헐버트는
그
누구보다
한글의
우수성을
발견하고
주장했던
인물이다
.
그는
한국인은
한글교육을
통해
무지를
깨우침으로서
최고의
가치를
창출하며
자유와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민족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
그가
1893
년에
재입국해서
삼문출판사를
맡게
된
것도
한글
문서
출판을
통한
교육과
계몽운동을
위해서였던
것이다
. 1897
년부터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신문을
한글로
발행하기
시작한
것이나
1901
년부터
한국
언어
,
역사
,
문화
,
풍습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The Korea Review
를
창간한
것도
모두
한글과
한국인에
대한
그의
사랑
때문이었다
.
헐버트는
배재학당의
주시경과
더불어
연구하며
한글의
로마자
표기법
,
띄어쓰기
그리고
점찍기
등을
도입하고
한글의
실용화와
보급을위해서힘썼던
것이다
.
한글과
한국인에
대한
그의
애정과
예찬은
그가
발행한
한국사
(1905)
와
대한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