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당하고 있던 여성교회(속회)를 이어받아 발전시키고 한국 감리교 최초로 구역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는
1892년에는
감리교
절제위원회를 조직해서
교인 신앙생활의 바른
자세와 길을 제시하기도
했고 1893년에는 맥길
선교사와 함께 원산에서
전도문서
보급과
사역에도
참여했다.
김창식은 올링거 집에서
머슴을 살면서 선교사
부부의 인격에 감화되어
1901년 한국 최초의
목사가 된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올링거는 또한 국내 최초의 영문 잡지 <The Korean Recorder>와 월간지 <The Korean
Repository>를 발행해서 한글과 더불어 한국 문화 역사 종교를 세계에 알리는 한편
대한기독교서회의 전신인 조선셩교위원회를 조직해서 초대 회장으로 기초를 닦아
놓기도 했다.
올링거는 중국 선교사 시절 1876년에 휴가를 맞이해서 그 해 4월 27일 베르타
양(Bertha Schwienfurth, 1856, 7. 4 - 1934. 5. 25)과 결혼했는데 신부의 아버지는
오하이오 주 감리교회 목사였고 그녀는 데이톤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결혼한 그 해 10월 중국 복주로 돌아가 함께 선교 사업에 종사했었다. 올링거 부부는
슬하에 두 아들과 두 딸을 두었었는데 1893년 5월과 6월에 13살 난 아들(David
Birchard, 1880-1893)과 9살짜리 딸(Wilhelmina 혹은 Willa, 1884-1893)을 모두
편도선염으로 잃는 아픔을 겪고 그 해 안식년을 맞아 고국에 돌아갔다. 올링거는 그 후
1895-1911년 다시 중국으로 복귀해서 대학에서 교수로 교육과 문서선교에 전념하다
1911년 건강상 이유로 은퇴하고 오하이오 주 톨레도로 돌아와 1919년 1월 6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중국문화와 자신의 선교경험에 대하여 여러 곳에서
강연하고 영어와 독일어로 글들을 발표했다. 베르타 역시 여행과 강연을 하며 남은
생을 살다 톨레도 공원묘지의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