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클레이와 가우처
올해는 맥클레이 (Robert Samuel Maclay,
1824-1907)의 한국 기독교 선교 130 주년이
되는 해이다. 맥클레이 선교사 부부는 한국선교를
독려하는 가우처의 편지와 재정적 지원을 받고
1884 년 6 월 24 일부터 7 월 8 일까지 일본에서
서울을 방문했는데 고종황제에게 선교 청원서를
올린 뒤 7 월 3 일 마침내 의료와 교육 분야에
한정해서 선교를 허락받았던 것이다.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내국인으로는 김옥균과 이수정이
수고했고 본국에서는 가우처 목사가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별히 가우처는
맥클레이와 펜실베이니아 주 딕킨슨 대학 동문이었고 그와 같은 볼티모어
연회소속이었다. 가우처는 언제나 맥클레이 선교활동의 든든한 동역자요
후원자였다.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손으로 1824 년 2 월 7 일에 펜실베이니아
콩코드에서 출생한 맥클레이는 1845 년에 딕킨슨 대학을 졸업하고 1846 년에
볼티모어 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다음 해 10 월에 중국선교사로 파송
받고, 1848 년 4 월부터 1871 년 12 월까지 푸저우(福州)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했다. 맥클레이는 가우처의 경제적 지원에 따라서 푸저우 지역에
진신당(眞神堂)과 천안당(天安堂) 등 교회를 건축하고 원동 선교구를
창립했으며, 푸저우 최초의 여자학교와 여러 초 중고등학교들과 사천대학 및
푸지안(福建)사범대학 등을 설립했다. 그는 감리교 출판사를 통해 푸저우
방언 신약전서를 발간해서 전도하기도 했다.
맥클레이는 또한 일본 기독교 선교를 활성화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1870 년부터 미감리교회 선교본부에 일본 선교를 주장했었는데
1873 년에 새 선교지의 감리사로 임명받고 그 해 6 월 11 일 일본에 도착해서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활동을 개시했던 것이다. 그는 중국에서 처럼 학원과
문서 선교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일본에서도 1879 년 10 월
감리교 신학원을 시작했고 이어서 동경 영어학원(Tokyo Ei Gakko)과
청산학원(Aoyama Gakuin) 설립에 있어서도 주요 역할을 감당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서적과 일어 성경 번역 등 문서 선교에도 힘을 썼다. 가우처는
맥클레이의 이 모든 사업에 있어서 그의 상담자요 지속적인 후원자였으며
학원 창립자였다.
한국 선교에 있어서 맥클레이는 공식적으로 한국 최초의 개신교 해외
선교사였고 한국 기독교 선교의 양부였다고 볼 수 있다. 맥클레이가 한국에
머물러 있었던 시기는 단 2 주밖에 되지 않지만 이 시기에 그는 고종황제에게
선교청원서를 올려 허락받음으로서 한국에 대한 해외선교의 물꼬를 트는
한편 선교기지를 물색해 정동일대를 매입할 수 있도록 조처를 취함으로 그
후에 입국할 선교사들의 발판을 마련했던 것이다. 맥클레이는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