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춘식 목사의 선교 이야기 - page 9

멸망사
(1906)
에도
반영되어
있다
.
헐버트의
우리나라
사랑은
그가
보여준
정치적
행보와
반일적
독립운동에
반영되어
있다
.
그가
다른
선교사들과
마찰을
일으켜
가며
황성기독교청년회
(YMCA)
조직하고
초대회장을
역임했던
것도
대한
청년들을
의식화시키고
계몽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 1895
을미사변
이후
고종의
신변보호를
맡기도
했던
헐버트는
외국인
선교사로서
고종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1905
년에는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알리고
1907
년에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우리나라의
주권회복과
일본의
침탈과
부당성을
세계에
선포하기
위해
밀사로
파견되기도
했었다
.
그는
때문에
일본의
농간에
따라
미국이
그를
송환하는
형식을
갖춰
우리나라에서
추방되었다
.
그러나
헐버트는
평생토록
우리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헌신한
애국자였다
.
안중근
의사는
여순
감옥에서
헐버트를
가리켜서
그는
한국인으로서
하루도
잊을
없는
사람이라고
회고했었다
.
헐버트는
1950
3
1
일에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인
태극장을
추서받았다
.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소원했던
헐버트
박사
!
양화진
그의
묘비에는
한국인
보다
한국을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헌신했던
빅토리아
풍의
신사
헐버트
박사
이곳에
잠들다
라고
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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