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선교의 선구자 올링거
아펜젤러 부부와 스크랜톤 가족이
1885년 우리 땅에 첫발을 내딛었을
때 국내외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고
콜레라가 만연하고 외국인에 대한
배척과 증오가 들끓고 있었다. 첫
선교사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직
선교적 열정을 통해 고독과 불안과
위험을
극복하며
1886년
미선교본부에 선교사 보충을
요청하는데 그렇게 해서 1888년 한국
땅을 밟게 된 선교사들이 올링거
부부와 존스 선교사였던 것이다.
미여선교회로부터는 1887년에 메타
하워드와 루이자 C. 로드웨일러가 보충되었다.
올링거(Franklin Ohlinger)는 1845년 11월 29일에 오하이오 주 샌더스키에서 출생했다.
올링거는 1865년 베레아 German-Wallace College (Baldwin-Wallace College)에
입학해서 졸업 한 후 1868년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했다. 그는 그 후 1870년부터 16년
동안 중국 복주에서 선교사역을 담당했고 한국에서는 아펜젤러의 요청에 따라서 1888년
1월부터 1893년 9월까지 활동했던 문서 선교의 선구자이다.
올링거가 한국에서 이룬 업적 가운데 하나는 삼문 출판사의 설립이다. 올링거는
교육선교의 활성화를 위해 배재학당에서 역사를 강의하는 동시에 중국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인쇄 제본 출판기계들을 들여와 학교 안에 한국 최초의 근대식 인쇄소를 만들고
그 이름을 한글 한문 영어 세 언어 활판인쇄를 목적으로 삼문 출판사라고 했던것이다.
삼문 출판사를 통해 올링거는 <누가 복음젼>을 비롯한 성서와 전도 책자들, 각종
교재들, <텬료력뎡>, <인가귀도>와 같은 한국 최초의 번역소설 작품들, <나병젼>같은
개인 저작물들 외에 <협성회보> <독립신문> 등 수많은 문서들과 정기 간행물들을
출판했다.
뿐만 아니라 올링거는 문서보급을 통해 당연히 교회설립과 전도에도 열심이었다.
1885년 부활주일 아침에 제물포에 첫 발을 내딛었던 아펜젤러는 올링거가 한국에
입국할 당시에 서울 정동의 선교본부 외에 특별히 제물포에 또 다른 감리교 선교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안간 힘을 쏟고 있었다. 따라서 올링거는 아펜젤러와 협력해서 노병일과
함께 인천 내리교회의 설립에도 기여했고, 1890-93년에는 정동 제일감리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하며 교회선교와 발전을 도모했던 것이다. 올링거는 스크랜톤 대부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