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춘식 목사의 선교 이야기 - page 2

운양호사건, 강화도 조약 등으로 세계 각국의 통상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아펜젤러는 드류에서 워즈워드라는 학우와 더불어 웨슬리의
후예가 되기 위하여 극동지역 선교를 꿈꾸고 있었다. 아펜젤러는 원래 일본
선교를 지망했고, 워즈워드는 미감리회 선교부 파송 한국 선교사로 이미
내정된 상태에 있었다. 그렇지만 워즈워드는 개인 사정으로 불가피하게
선교사 지원을 철회하게 되었고, 아펜젤러는 워즈워드 대신 한국으로 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아펜젤러를 통하여 한국감리교회를 시작하려고 했던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 간섭과 섭리였다고 할 수 있다.
아펜젤러(2)
아펜젤러는 고종황제가 조건부로 선교를 허락한 교육과 의료분야에
있어서 교육담당으로 파송된 감리교 선교사였다. 아펜젤러가 교육자로서
정동에서 2 명의 남학생들을 데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한 때는 1886 년 6 월 8 일이었다. 고종황제는 후에 이 학교의 교명으로
배재학당이라는 현판을 하사해 주었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의 당훈 으로
“크고자하거든 남을 섬기라”는 말씀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젊은 청년들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이 땅에서 구현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희생과 사랑을 실천하자는 것이었다. 아펜젤러는 배재 학당
장으로서 그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며, 다른 미션 스쿨이나 국내 공사립
학원 설립에도 협조했다.
아펜젤러는 또한 선교사와 목회자로서 외국인 선교와 국내 전도에
힘쓰며, 현재 감리교 신학대학의 전신인 배재 신학부를 통해서 복음
사역자들을 양성하고, 여러 곳에 교회를 개척하고 지도했다. 예를 들어,
아펜젤러 부부가 제물포에 상륙해서 서울로 입성하기 전 당분간 숙소와
기도처로 사용하던 초가집은 현재 인천 내리 교회의 모태가 되었고,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학생들의 예배처소로 아펜젤러가 건축한 벧엘 채플은
정동제일교회로 재건되었다. 또한 아펜젤러가 종로에서 운영하던 기독서점은
현재의 중앙 교회가 되었다. 아펜젤러는 기독교 문서 활동에도 열성적이었고,
직접 회보를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그는 북쪽 평양 지역에도 두 차례에
걸쳐서 선교탐사 여행을 함으로써 북방선교의 길을 열었고, 다른 교단에서
파송된 선교사들과 연합해서 교회연합운동의 모범도 보였다.
그러나 아펜젤러가 선교사로서 그 무엇보다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작업이었고, 아펜젤러가 순직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 당시 선교사들과 한국인 번역자들로 구성되었던 성서
번역자회는 1900 년 9 월에 우리 말 신약 성경을 출판한 다음 구약 성경의
번역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고, 1902 년 6 월에는 목포에서 고린도 전 후서에
대한 수정과 독회 그리고 구약성서 번역작업을 논의할 예정이었다.
아펜젤러는 이 일로 6 월 첫 주에 제물포에서 기선을 타고 목포로 갈
계획이었지만 6 월 1 일에 한국을 방문 중에 있었던 미감리교회 무어 감독
일행을 모시고 경기도 시흥에 있는 무지내 감리교회 봉헌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길을 가다가 일본인 노동자들에게 봉변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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